채팅 다음에 필요한 것
AI와 대화하는 일과 AI와 함께 작업하는 일은 달랐다.
처음에는 채팅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아이디어를 말하면 정리해주고, 막힌 부분을 물어보면 선택지를 보여주고, 코드를 요청하면 바로 만들어주었다.
AI를 잘 쓰는 일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일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제품을 만들고, 코드를 수정하고, 여러 AI 도구를 오가며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문제는 다른 곳에서 드러났다.
채팅은 생각을 꺼내는 데 좋다. 하지만 생각을 작업으로 바꾸는 데는 부족하다.
채팅은 작업 단위가 아니다
대화 속에서는 분명했던 것이 작업으로 넘어가면 흐려질 때가 많았다.
무엇이 결정되었는지, 왜 그렇게 정했는지, 무엇은 버렸는지, 어디까지가 이번 범위인지, 무엇을 완료라고 볼지.
이런 것들이 남아 있지 않으면 AI는 빠르게 만들지만 그만큼 빠르게 엇나간다.
채팅은 흐름이다.
생각이 이어지고, 질문이 이어지고, 답변이 이어진다.
하지만 작업에는 상태가 필요하다.
무엇이 결정되었는지, 무엇이 남아 있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지, 다음 단계에 무엇을 넘길지.
이 상태가 없으면 대화는 많이 했지만 작업은 다시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상태가 된다.
문제는 대화의 양이 아니었다. 대화에서 나온 생각이 다음 실행으로 넘어갈 수 있는 형태가 되었는가였다.
AI에게 바로 시키면 빠르게 엇나간다
AI는 실행이 빠르다.
화면을 만들고, 버튼을 붙이고, 로직을 작성하고, 파일을 생성한다.
겉으로 보면 작업이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확인해보면 처음 의도와 어긋난 부분이 자주 보인다.
당연히 있어야 할 상태가 빠져 있거나, 취소 버튼의 동작이 이상하거나, 화면 전환의 기준이 맞지 않거나, 예외 상황이 비어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AI가 왜 이것도 못 하지 싶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겪다 보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AI가 못한다기보다, 내가 원하는 일을 AI가 실행 가능한 형태로 넘기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도 비슷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완료를 판단할지,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해도 되는지.
이런 것이 없으면 일은 진행되지만 결과는 흔들린다.
AI에게 일을 맡기는 일도 점점 그런 일에 가까워졌다.
더 많은 자동화가 답은 아니었다
한동안은 더 많이 자동화하면 해결될 것 같았다.
AI가 기획하고, AI가 개발하고, AI가 검토하고, AI가 다시 수정하면 품질이 안정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검증을 많이 넣으면 결과물의 평균 수준은 올라간다.
하지만 흐름은 무거워졌다.
호출은 늘어나고, 시간은 길어지고, 확인해야 할 산출물도 많아졌다.
뒤에서 계속 고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다.
끝까지 다 자동화하는 것보다 처음에 덜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겠다.
실행 이후의 검증보다 실행 이전의 구조가 더 중요할 수 있겠다.
많은 문제는 개발 중에 생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개발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을 만들지 흐릿한 상태에서 개발이 시작되고, 왜 만드는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기능이 추가되고, 범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정이 반복된다.
AI는 이런 상태에서도 일단 결과물을 만든다. 그래서 더 위험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막혀서 멈췄을 지점에서도 AI는 앞으로 나아간다.
무언가 만들어지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와야 할 일이 함께 쌓인다.
채팅 다음에는 설계가 필요했다
채팅 다음에 필요한 것은 바로 개발이 아니었다.
대화를 작업 가능한 구조로 바꾸는 단계가 필요했다.
생각을 꺼내고, 방향을 비교하고, 결정 사항을 남기고, 화면과 데이터와 흐름을 나누고, 다음 AI가 실행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는 것.
그 과정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설계에 가까웠다.
설계는 문서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왜 그렇게 정했는지 남기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지 정하고, 다음 실행자가 어디까지 가정해도 되는지 알려주는 일이었다.
여기서 다음 실행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AI일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맥락을 전달해야 하고, AI에게는 실행 가능한 구조를 전달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판단이 전달 가능한 형태로 남아 있는가였다.
LAO는 그 과정에서 나온 실험이다
LAO는 이런 고민 속에서 만들어졌다.
AI와 함께 일하다 보니 채팅과 실제 작업 사이에 비어 있는 단계가 계속 보였다.
바로 개발로 넘기면 수정이 반복되고, 여러 AI 도구를 오가면 맥락이 흩어졌다.
그래서 채팅에서 나온 생각을 결정, 기준, 구조, 산출물로 바꾸는 방식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를 [LAO]라는 이름으로 GitHub에 공개해두었다.
아이디어를 바로 개발하지 않고 먼저 여러 방향으로 탐색한다.
선택된 방향을 화면, 데이터, 흐름, 구현 단위로 나눈다.
각 항목 사이의 관계를 남긴다.
그리고 다음 AI가 실행할 수 있는 설계 형태로 넘긴다.
LAO는 특정 기능을 만들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AI와 함께 일하면서 반복해서 마주친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응 방식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LAO라는 이름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질문이다.
AI와 대화한 내용은 어떻게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여러 AI를 함께 쓸 때 맥락과 결정은 어디에 남아야 할까.
사람은 어디에서 방향을 정하고, AI는 어디까지 실행해야 할까.
AI와 함께 일하는 방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지금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실험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LAO는 그 실험 중 하나다.
채팅은 생각을 꺼내는 데 좋다. 하지만 일을 이어가려면, 채팅 다음의 구조가 필요하다.